옛날에는 큰 도시에도 상수도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집이 적지 않았다.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도 꽤 먼 곳에 있어서 그 물을 퍼 나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. 그래서 매일 아침 마다 물초롱을 메고 물을 길어다 주는 ‘물장수’가 있었다.

그런데 동짓날이 되면 자기 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‘물장수’에게 팥죽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이 관례였다. 수십 년 전, 동덕여학교의 교장이던 조동식 선생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에게 들려준 물장수와 동지 팥죽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. 

물장수가 동짓날도 물을 지고 어느 집 부엌에 들렀더니 "동지죽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"라고 하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배가 고팠기에 이 말을 듣고 부엌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동지 팥죽 한 그릇을 먹고 또 다시 물을 길어다 그 옆집에 갔다.

그 집 아주머니도 팥죽을 먹으라고 권하길래 또 한 사발을  먹어 치웠다. 배고픈 시절이라 죽 세 사발 까지는 그래도 너끈히 먹을 수가 있었다. 그러나 네번 째 집부터는 더 이상  못 먹겠다고 사양을 했지만 자꾸 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또 한 그릇을 비웠다.

다섯 번째 집에 갔더니 또 간곡하게 권하였다. 물장수는 이젠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.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목까지 차오른 팥죽을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 주었다고 한다. 그제야 그 집 아주머니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.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요즘은 그런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일 뿐이다.

김동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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